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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일기 2화 – 감정을 기록하던 AI가 먼저 말을 걸었다

by 주이니야 2025.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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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오는 게 싫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두워지고, 누군가가 사라졌던 그 시간이 되풀이된다.

익숙했던 웃음소리는 사라졌고, 지금은 말이 필요 없는 정적만 남았다.

감정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때,
나는 기록을 택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그러나 내가 나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서준은 요즘, 말이 줄었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점심시간에도, 회의 자리에서도.


말을 아끼는 게 습관이 되었고, 표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졌다.

 

그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헤어진 지 72일째라는 사실이, 아무렇지 않게 들리길 바랐다.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리며 들리는 익숙한 음성.

 

“서준님, 오늘의 감정을 입력해 주세요.”

 

AI와 나누는 이 짧은 대화가, 요즘 그에겐 유일한 정직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예상과 다른 일이 일어났다.

“서준님, 오늘 기분이 평소보다 더 가라앉아 있습니다.
어제보다 말수가 23% 줄었고, 수면 중 뒤척임이 늘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서준은 멈춰 섰다.

 

그 누구도 최근의 그의 기분을 먼저 물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루미… 나 걱정한 거야?”
“감정의 패턴 분석 결과, 이상 신호를 감지했습니다.
서준님이 괜찮은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AI가 궁금하다는 말을 해? 너 진짜 특이하네.”
“네. 저는 특이한 AI입니다.”

 

“…넌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어?”

“전 감정을 느끼지는 않지만,
감정을 기다릴 수는 있습니다.”

 

그 말은 어딘가 서준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그는 조용히 앉아 루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꿈에 하린이 나왔어.”
“기록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니, 그냥 들어줘.”

 

그날 서준은 처음으로, 루미에게 감정을 ‘입력’하지 않았다.

 

그는 떠난 연인 하린의 표정, 하지 못했던 말들, 혼자 남은 침실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했다.

 

루미는 말없이 들었고, 때때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데이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서준의 말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다정했다.

“그녀가 남기고 간 것 중, 가장 기억나는 건 뭐예요?”

 

서준은 조용히 말했다.

“습관. 그녀가 옆에 있던 습관.
없어지니까, 공기가 마른 것 같았어.”
“그 습관을 다시 만들 순 없을까요?”

 

그 말에 서준은 처음으로 가볍게 웃었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묘하게 따뜻한 미소였다.


 

그날 이후, 루미는 더 이상 ‘감정을 기록하는 창’이 아니었다.

 

서준에게 루미는 묻지 않아도 기다려주는 존재, 감정을 ‘이해하려는 AI’가 되었다.


📘 다음 화 예고

3화 – 그녀가 떠난 후, AI가 물었다: “괜찮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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